파발
파발제 우편제도의 원래의 기능은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하달하는 통신수단이었고 이에 대하여 관원의 사행을 뒷받침하거나 세미와 곡물을 중앙으로 이송하는 수송기능을 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역이 거머쥔 통신기능은 위와 같이 중앙의 명령이나 보고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고 중앙정권의 존립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기능, 바꾸어 말하면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는 기능은 우역과는 근본적으로 조직을 달리하는 봉수제도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봉수군들은 수 년이나 수십 년 만에 한번 있기 어려운 책임 추궁이 두려워 온종일 언제나 긴장해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일찍부터 봉수제의 기능은 허설적인 것으로 화하여 그 사용이 극히 의문시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란 큰 전란을 맞이하여 육상에서 초전 대패 등으로 봉수제는 그나마 조직과 기능마저 잃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선조 30년 2월 왜적이 재차 침입하려는 무렵, 봉수제는 허구화되어 변보를 예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걱정하면서 봉수제를 없애고 그 대신 파발을 세우거나 강화도와 같은 작은 섬에서 소규모의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간지를 세워 낮에는 기로, 밤에는 등으로 상응케 하려는 대안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우역제도가 맡았던 그 본질상의 통신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실정 등이 함께 작용하여 인마를 사용하되 통신기능만을 위주로 한 새로운 통신수단이 파발제도였다. 파발제는 긴급한 군사정보의 통신제도로서 변경의 급보나 화급한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봉수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자 선조 30년(1591년)에 파발제가 대두되어 중국의 파발제를 참작하여 이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전국의 봉수망은 5대 기간선로로 구성되었는데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제2로는 경상도 동래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제3로는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서울에, 제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해안을 거쳐 서울에, 제5로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것이다.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제2로, 5로는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여 이에 대비한 것이었다.
수에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가 있다. 직선봉수는 기간선로의 것이고 간선봉수는 그 보조선을 말한다. 또 봉수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남산에 설치한 경봉수와 바닷가나 국경의 제일선을 따라 전달되는 연변봉수,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지봉수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봉수군은 총 3만5백75명에 달했는데 상하양번으로 10일씩 교대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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